카테고리 없음 / / 2023. 4. 25. 21:32

농경의 시작,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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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을 발생시킨 잉여 농작물

모든 문명은 강 하류를 근거지로 삼아 발달했다. 농사짓기에 좋은 퇴적층이 하류에 쌓이기 때문이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하류에 살던 수메르 사람들은 강줄기를 따라 여러 개의 마을을 이루었다. 이후 농경의 확대로 잉여 농작물이 생겼고 빈부 격차가 발생했다. 이로써 사회 구성원이 함께 생산하고, 생산물을 평등하게 분배하던 인간 사회에 최초로 사유 제도가 나타났다. 수메르에선 밀 생산량에 따라 계급도 달라졌다. 계급이 나뉘고 공동체가 커지면서 관개 시설 건설등에 필요 한 여러 가지 통치 수단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관개 시설과 농기구의 발달로 농업 생산량이 많이 늘어났고 이는 주변 지역과의 교역에 필요한 자본이 되었다. 수메르 사람들은 잉여 농작물을 다른 필요한 물건들과 바꾸기 시작했다. 물물교환을 위해 '밀 다발'을 화폐로 사용했는데, 이걸 '세겔'이라 불렀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화폐로 쓰고 있는 세겔은 인류 최초의 화폐이자 가장 오래된 화폐 단위이다. 인류 최초의 재배 작물, 인류 최초의 교환 작물, 인류 최초의 화폐처럼 밀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인류 최초의 도시, 예리코

농경을 통해 정착 생활이 이루어진 후 인류 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해 나가 마을들이 형성된다. 터키의 차탈회위크 유적과 괴베클리 테페 유적이 신석기 시대 초기 농경 정착촌의 생활을 부여 주는 대표적인 마을 유적이다. 물물교환이 상업과 교역으로 발전하면서 기원전 9,000년경 가나안의 사해 인근 예리코에 인류  최초의 도시가 건설된다. 예루살렘과 암만을 연결하는 중간쯤에 있는 예리코는 강물이 뱀처럼 똬리를 틀며 사해로 들어가는 낮은 계곡 들판의 심장부에 있다. 예리코 사람들은 거주지 근처의 요르단 계곡 지대에서 밀과 보리를 재배하기 위해 밭을 만들었다. 겨울에 밀과 보리농장을 지으려면 200밀리미터 이상의 비가 내려야 가능한데,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으로는 농사짓기 힘들었던 사람들은 우기 때 유다 광야와 사마리아 산지에 내린 비가 계곡 지대에서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샘에서 되솟아나는 것을 농사에 사용했다. 구석기 말기로는 약 4만 제곱미터의 놀라운 규모의 마을을 형성하고 높은 성벽을 지어 살았다. 마을이라기보다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일종의 도시였다. 이렇게 사해 인근에 인류 최초의 도시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예리코가 교통의 요충지이자 통상로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상업과 교역이 발달했다. 예리코는 샘물이 있어 밀과 보리농사는 물론, 사막의 주식이라 불리는 대추야자나무와 파파야 등 아열대성 과일 농사도 지을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인간에게 필요한 소금을 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예리코는 남북 통상로인 계곡기 한가운데에 있고 인근 요르단 강의 강폭이 좁아 강을 건너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고, 오아시스가 있어 상인들의 중간 집결지였다. 고고학자들은 예리콜르 포함한 요르단 강 서쪽 일대와, 요르단, 이라크, 시리아의 산기슭에서 밀과 보리를 재배하고 염소와 양을 가축화한 정착지의 자취를 발견했다. 

밀이 가는 곳에는 빵도 함께

밀을 재료로 한 빵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고대 근동과 이집트 사람들은 구운 이삭을 돌로 문지르거나, 말리거나, 절구를 사용해 곡물 껍질을 벗겼다. 그런데 밀은 낟알이 쉽게 깨지기 때문에 껍데기만 손쉽게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알곡을 통째로 부서뜨려 가루를 낸 다음에 껍질을 따로 제거했다. 최초의 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곡물가루를 물과 섞어 만든 반죽에 열을 가해 만들었을 것이다. 초기의 빵은 납작하고 딱딱했다. 최초의 발효빵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고대 이집트 지역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발효빵을 처음 만들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당시 이집트의 한 소년이 빵을 굽고 남은 반죽을 그대로 두었는데, 이것이 공기 중의 효모균에 의해 자연 발효되어 부풀어 올랐다고 한다. 부푼 반죽을 구웠더니 기존 딱딱한 빵과는 다른 부드러운 감촉의 맛있는 빵이 되었다. 반죽이 발효되면서 공기구멍이 많이 생겨나 소화도 잘 되고 맛과 향도 더욱 좋았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집트에서는 점차 빵 만드는 방법과 효모 배양법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 뒤 이집트 사람들은 발효 물질인 누룩을 넣어 먹기 좋은 빵을 만들었다. 빵 만드는 방법이 지중해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가게 되면서 유럽 대륙 전역에 천연 효모 발효빵을 만드는 방식이 보편화되었고, 후대의 그리스와 로마에도 잔파되었다. 특히 로마에서는 제분, 제빵 기술이 크게 발달했고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이 기술들도 유럽 각지로 전해졌다. 이렇게 빵 문화의 전파 덕분에 밀농사도 널리 퍼졌다. 그 뒤 밀은 몽골과 인도를 통해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현재 중국은 세계 최대의 밀 생산국이다. 우리나라에는 기원전 200년~기원전 100년경에 유입되었다. 이렇게 밀이 잘 전파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밀이 자라는 기후 조건이 까다롭지 않기 때문이다. 밀은 온대 지방에서 가장 잘 자라지만, 기후 적응성이 강해 기온이 낮거나 건조한 지역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쌀보다 넓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장점을 갖고 있다.

한국 현대사 속의 밀

우리 민족에게는 6.25 전쟁의 상처가 매우 깊다. 전쟁이 끝난 직후 한국인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극심한 물가 폭등과 실업에 내몰렸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 미국은 당장 해결이 시급한 한국의 기아문제와 전쟁 피해 복구를 위해 원조를 재개했다. 1950~51년 미국 원조는 1억 달러 수준이었으나 원조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1953년부터는 연간 2억 달러 수준으로 늘었다. 휴전 즈음인 1953년 7월에는 1954년도 한국의 경제부흥비로 3억 달러를 책정한 법안이 미국 의회를 통과했다. 이어 이듬해 7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1955년도 원조 금액으로 무료 7억 달러를 얻어 냈다. 당시는 정부와 국민 모두가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했다. 미국은 농산물 등 그들의 잉여 물자로 한국을 지원했다. 1955년 5월에 한미 잉여 농산물 협정이 체결되어 이때부터 미국산 잉여 농산물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왔다. 당시 우리나라는 의식주 해결이 가장 급했다. 미국은 밀을 위주로 한 보리 등의 농산물을 보냈다. 당시 미국산 잉여 농산물은 한국 곡물 생산량의 40%를 차지했고, 그 가운데 밀이 70%였다. 따라서 당시 밀가루값은 쌀값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쌌는데 쌀의 6분의 1 가격이었다. 남한에 1952년 대한제분이 생기고, 1953년 조선제분이 시설을 복구함으로써 밀가루가 국내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당시 국수 가게와 빵 공장들 번창했다. 하지만 국수를 사 먹을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배급받은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그때 밀가루 음식이 물리도록 먹은 탓에 지금도 밀가루 음식이라면 꼴도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1950년대에는 쌀이 부족하여 교사와 공무원 월급으로 베트남에서 수입하 안남미라는 찰기 없는 푸석한 쌀을 배급하기도 했다. 이때 원조 물품을 토대로 발전한 것이 제분, 제당, 방직산업이었다.

주목받는 한국 토종 앉은뱅이 밀

우리나라에도 토종밀 품종이 있다. 그 중 '앉은뱅이밀'이라 하여 서야 밀에 비해 키가 50~80센티미터로 작은 품종이 있다. 최근 앉은뱅이밀 품종이 기존의 농작물을 개량하여 보다 실용 가치가 높은 품종으로 발하는 학문인 육종학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키가 작으면 쓸모없는 줄기가 짧아 많은 낟알을 달고도 쓰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련 학자들은 작은 키의 앉은뱅이밀과 수확이 많은 품종을 교배하여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앉은뱅이밀을 일본으로 들여갔다. 미국의 농학자 노먼 볼로그는 일본에서 찾아낸 앉은뱅이밀 계열의 품종을 활용해 1억 명의 생명을 살렸다. 당시 세계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노먼 박사는 앉은뱅이밀을 개량한 품종으로 밀 수확량을 60%까지 늘려 동남아 식량 문제를 해결했고 그 공로로 그는 농학자로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인류가 강 하류의 토적지에서 밀을 재배하기 시작함으로써 인류의 4대 문명이 발생했을 만큼 밀은 인류 역사의 태동과 함께한 최초의 먹거리이다. 인류의 물물교환 시작도 밀과 다른 물품을 바꾸는 것으로부터 시작했고, 이후 밀은 물물교환의 매개체, 즉 화폐의 역할도 했다. 고대로부터 이렇게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온 귀중한 밀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즐겨 먹는 음식 재료로써 우리에게 즐거운 미각을 선사하고 있다.

밀 덕분에 맥주가 탄생했다

맥주는 인류가 즐겨 마시는 대표적인 술 중 하나인데, 흥미롭게도 밀과 보리가 없었다면 맥주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는 밀과 보리를 발효시켜 빚은 음료를 마셨으며, 이것이 지금 맥주의 기원이 되었다. 초기 맥주는 지금의 맥주처럼 맑은 황금색이 아니라, 걸쭉하고 빵 반죽처럼 걸쭉한 형태였으며, 빵과 함께 먹는 경우도 많았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맥주가 신성한 음료로 여겨졌으며,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들에게 임금 대신 맥주와 빵을 지급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대 수메르 문명에서는 맥주를 빚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맥주를 즐기는 여신 '닌카시'를 숭배하여 맥주 제조법을 시처럼 기록하기도 했다. 밀과 보리가 발효되면서 탄생한 맥주는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음료이며, 밀이 없었다면 인류는 지금과 같은 맥주 문화를 누릴 수 없었을 수도 있다.

밀가루는 한때 '독'이라고 여겨졌다

지금의 밀가루는 빵, 국수, 케이크 등 다양한 음식의 재료로 사용되고 있지만, 한때 유럽에서는 밀가루가 건강에 해로운 '독'이라고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다. 16~18세기 유럽에서는 흰 밀가루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곰팡이 독소나 중금속이 포함될 가능성이 있었고, 영양소가 부족한 흰 밀가루를 주식으로 한 귀족들 사이에서 건강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18세기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흰 밀가루를 지나치게 소비한 귀족들 사이에서 괴혈병과 같은 질병이 유행하면서, 일부 사람들은 밀가루가 독성이 있다고 믿었다. 반면, 가난한 농민들은 통밀을 그대로 빻아 먹었기 때문에 오히려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영양학이 발전하고 정제 과정이 개선되면서 밀가루는 안전한 식품으로 자리 잡았으며, 전 세계인의 주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현대에서도 정제된 밀가루보다는 통밀이 더 건강에 유익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아, 다시 통밀 제품이 각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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